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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지지자만 바라보는 ‘캠페인 정당’

칼럼

by 정소군 2022. 10. 2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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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보수 정치.'

 

영국 보수당은 전 세계 보수 정당들의 롤모델이었다. 국내에서도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대패하자 ‘300살 영국 보수당의 비결’을 배우라는 분석기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보수당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2019년 열린 영국 총선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그런 보수당이 전 세계의 근심거리가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지난 9월 취임한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경제 전문가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글로벌 경제 상황에 역행하는 섣부른 감세안을 발표했다. 그 여파는 영국을 넘어 세계 금융시장을 최악의 혼돈에 빠뜨렸다. 파운드화는 곤두박질쳤고, 영국은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취임 6주 만에 떠밀리듯 사퇴한 트러스는 보수당 내에서조차 ‘양상추’보다 수명이 짧은 총리라는 조롱거리가 됐다.

 

취임 44일만에 총리직을 그만두며 사퇴 연설을 하는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그러나 현재 영국과 보수당이 처한 이 모든 굴욕적인 상황들이 과연 ‘이게 다 트러스 때문’이란 한마디로 정리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트러스는 보수당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보수당은 선거에는 능하지만 정부 운영에는 취약한 시스템을 가진, ‘캠페인 정당’으로 전락하고 있다. 도대체 애초에 대규모 감세안이라는 비상식적인 공약을 내건 트러스가 어떻게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보수당은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이끌던 노동당에 패해 18년 만에 정권을 뺏기자 이전까지 의원들 간 투표로 정해왔던 당대표 선출 방식을 바꿨다.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들에게 최종 후보 두 명 중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을 준 것이다. 당에 대한 충성도와 결집력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쇄신책이었다. 당원들의 정치 참여를 높이기 위함이니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이 같은 방식은 보수당이 야당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집권당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영국은 집권당 대표가 곧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2016년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불과 6년 만에 총리가 4번이나 바뀌었다. 이 중 보수당 대표로서 총선을 치르고 총리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트러스, 그 뒤를 잇게 된 리시 수낵까지 모두 전임 총리의 중도 사퇴로 보수당 내부 경선에 의해 당대표가 된 후 자동적으로 총리가 된 사람들이다(다만 존슨은 2019년 7월 총리가 되고 나서 그해 12월 조기 총선을 실시한 후 재집권했다).

 

그나마 메이는 결선에 함께 오른 상대 후보가 “메이의 성공을 바란다”며 지지 선언을 해준 덕분에 결선을 치르지 않고 단독 후보로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선출직 의원들에 의해 간선제로 뽑힌 총리는 대의제의 명분에 그래도 최소한은 부합한다. 문제는 존슨과 트러스처럼 20만명도 안 되는 보수당 권리당원들의 결선투표로 총리가 결정되는 경우다.

 

보수당 권리당원들의 면면은 영국 국민 평균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수당원들의 44%는 65세 이상이다. 97%는 백인이며, 대부분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남성들이다. 또 보수당원들은 다른 정당의 당원들보다 영국의 여행보험사인 ‘사가’를 이용하는 비율이 최소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풍족한 여생을 즐기고 있는 중산층 은퇴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들이 바로 트러스를 총리로 뽑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트러스뿐 아니라 보수당 경선 당시 후보로 나선 의원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감세 공약을 내걸었다. 감세가 인플레이션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경쟁 후보들의 주장을 “동화 같은 얘기”라고 유일하게 비판했던 수낵조차 보수당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낮게 나오자 막판 결선투표를 앞두고는 한때 감세로 돌아선 바 있다.

 

이렇게 한 줌의 보수당 권리당원들에 의해 선출된 트러스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졌다. 영국의 총리는 국회 인사청문회 같은 견제장치 없이 마음대로 장관을 임명할 수 있다. 트러스는 감세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실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정치적 동맹인 쿼지 콰텡을 재무장관 자리에 앉혔다. 콰텡 역시 영국 역사상 최단기 재무장관이라는 오명을 얻고 경질됐다.

 

러스 사퇴 이후 감세안 후폭풍을 수습하기 위해 구원투수로 나선 수낵 총리와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이 각각 트러스·존슨과 당대표 결선투표에서 맞붙었다가 당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패배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참 공교롭다. 결국 현재 영국과 보수당이 처한 위기는 지지자만 쳐다보고 가는 정권이 어떤 헛발질까지 하게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다. 300살 영국 보수당에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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