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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학교·군대·사회에서 학습되고 대물림…‘미운털 박힐라’ 눈치보며 알아서 처신 (2017.6.2)

사회

by 정소군 2022. 3. 1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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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의전 공화국’이 되었나

 

지난 1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국립현충원에 참배를 왔다. 현충원 측이 추운 겨울임을 감안했다며 방명록 사이에 미리 끼워 놓은 핫팩이 보인다.

 

의전(Protocol)은 그리스어인 Proto(맨 처음)와 Kollen(붙이다)의 합성어인 ‘Protokollen’에서 기인한 단어다. 원래 공증문서에 효력을 부여하기 위해 문서 맨 앞장에 붙이는 용지를 의미했지만, 외교관계를 담당하는 정부의 공식문서 양식으로 의미가 확장되다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 쓰이게 됐다.

 

모든 의전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필요할 때도 있다. 특히 외교에서 국격에 걸맞은 의전을 요구하고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3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의 일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조깅을 한 후 청와대 녹지원에서 수영을 즐길 때 청와대 의전팀은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미리 파악해 수영장 스피커로 틀었다. 훗날 클린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감동을 받았다’며 이 장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직후 열린 양국 정상회담 분위기가 좋았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의전은 사람 개인에게 주는 예우가 아닌, 그 자리가 갖는 대표성을 보고 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외교부 의전장을 지낸 백영선 전 대사는 “민간이나 개인에 대해 의전 운운하는 것은 원래는 안 맞는 단어 사용”이라면서 “물론 언어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할 수 있지만, 기업 등 민간에서 권위를 지키는 수단으로 생각해 정작 국가 정상들은 신경도 안 쓰는 것에까지 집착하면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KB 사태’ 때 지주 회장과 은행장이 한꺼번에 날아간 결정타도 알고 보면 의전 문제가 불씨가 됐다. 2014년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행장은 국민은행 주전산기 교체를 두고 대립했다. 금융감독원이 징계에 나서자, 양측은 화합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미에서 임원들이 참여하는 템플스테이 행사를 가졌다. 양측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임 회장에게만 독방이 제공되자 이 행장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결국 1박2일로 예정됐던 백련사 템플스테이는 이 행장이 심야에 귀가해버리면서 파국을 맞았다. 두 사람은 결국 들끓은 여론과 금융당국의 공세 속에 함께 사퇴했고 검찰 수사까지 받았다. ‘왜 내겐 독방을 안 주느냐’는 측이나 ‘회장만 독방을 써야 맞다’는 측 모두 결국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 반자발적으로 학습되고 대물림

지난해 12월 귀국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서울역에서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그의 귀국 행사를 앞두고 대합실에 앉아 있던 노숙인들이 영하권의 날씨에 일제히 밖으로 쫓겨나 ‘과잉의전’ 논란이 빚어졌다.

 

그러나 ‘과잉의전’은 의외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권위주의가 오랜 기간 학습돼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된 탓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크고 작은 기업들이 신년하례식을 하는데 권력을 가진 자는 단상 위, 일반 직원들은 단상 아래로 위치가 갈린다”면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반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권력 서열대로 줄을 서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재계의 한 여성 최고경영자(CEO·사장) ㄱ씨가 지방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통상 이 회사는 사장의 사업장 방문 때 일부 임직원들이 정문에 도열한다. 이때 ㄱ사장이 직원 중 임신부를 보더니 “여기 왜 임신부가 있느냐”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사업장에 비상이 걸렸다. 한 임원이 “사장님이 임신부를 보기 싫어하시니 앞으로는 임신부는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직원들 사이에서 ㄱ사장이 너무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 얘기가 본사까지 퍼졌다. 이상하게 여긴 본사의 한 임원이 망설이다 ㄱ사장에게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자 ㄱ사장이 이렇게 답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난 임신한 여성이 오래 서 있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 나오지 않고 앉아 있도록 해주라는 뜻으로 말한 거예요. 내가 직접 임신하고 애를 낳은 사람인데 설마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겠어요?” 사업장 임원의 ‘오버’가 되레 사장의 이미지를 깎은 것이다.

 

신 교수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로 학교와 군대에서의 학습효과를 꼽았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 이뤄지는 학교조차 교장이나 교무처장 같은 소위 ‘자리’에 대한 특권의식이 강한 문화”인 데다 “교실에서도 어른인 교사는 왕이고 학생들은 종속적인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특히 군대는 의전 문화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작전에 실패한 장교는 용서가 돼도 의전에 실패한 장교는 용서가 안된다’는 군대 농담이 단적인 사례다.

 

권위적인 계급사회일수록 과잉의전을 하게 되는 더 직접적인 이유는 의전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든지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갑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잠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잉의전의 대부분은 사실상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서 “이는 지위 격차가 큰 조직일수록 더 심해진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기업 계열의 유통업체 직원인 ㄴ씨는 “부장이 대학원 논문을 쓰는데 대신 데이터를 돌려주고 백업 자료까지 만들어 준 선배가 있었다”면서 “부장은 선배에게 ‘시간 되면 좀 도와줘’라고 했지만 말이 ‘도와줘’이지 반강제적인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사고과를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한 화장품 업체 직원인 ㄷ씨도 “여성 임원이 김장한다는 말에 직원들 일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서 도와준 적이 있다”면서 “‘이렇게 하면 좋아하겠지’ 싶어서 욕하면서도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의전’도 업무능력의 일부로 여겨지다 보니 안 하면 ‘미운털’이 박힐까봐 하게 되고, 더 열심히 해서 ‘예쁨’받아 승진하고 싶다는 생각에 ‘과잉의전’까지 하게 되는 셈이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또 다른 군대 농담 중에 ‘계급은 마누라가 달아준다’는 말이 있다”면서 “정말 싫어하는 말이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전 하나로 성공한 신화도 실제로 존재한다. 의전이 세기로 유명한 한 재벌그룹의 박모 부사장은 의전 담당자들 사이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박 부사장은 의전 능력만으로 부사장까지 승진한 인물”이라며 “유난히 의전을 중시하는 기업이기에 가능했을 일이긴 하다”고 평가했다.

 

지난 5월23일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이 김포공항 게이트에서 수행원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캐리어를 밀어던져 소위 ‘노 룩 패스’로 화제가 된 장면.

 

상사에게 의전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나중에 상사가 되면 자신도 똑같이 그 정도의 의전을 받길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의전의 폐해는 학습되고 대물림된다. 제약회사 직원 ㄷ씨의 말이다. “우리 회사는 임원들이 골프장 갈 때 새벽에 일찍 가서 대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 차를 뽑으면 쾌적한 환경을 위해 피톤치드까지 뿌려드리는 등 나름 의전이 센 편이다. 그런데 의전 준비하면서 같이 흉보고 욕했던 사람도 나중에 임원이 되고 난 후엔 후배들이 본인을 그렇게 안 챙겨주면 화내고 섭섭해하더라.”

 

■ 의전 발달할수록 개인은 사라지고 조직 위계만 남아

 

신광영 교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유난히 의례가 복잡하게 발전했던 시기는 계층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던 조선시대였다”면서 “의례를 통해 권위를 과시하고 이른바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받았던 것인데, 오늘날의 의전이 바로 그와 같은 원리”라고 지적했다. 그는 “의전이 발달할수록 개인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조직과 위계만 남게 된다”고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도 “최근 서구식 합리주의나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직급 대신 ‘~님’이나 ‘~씨’라고 호칭을 부르는 기업들이 생겨나는 등 과거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권위를 중시하는 것은 여전하다”면서 “불필요한 의전과 허례허식이 사회 구성원들의 소통을 방해하고 조직의 합리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과잉의전의 악습을 깨기 위해서는 의전을 받는 사람들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태연 교수는 “이전까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더 높게 올라가려는 방식의 의전을 고수해왔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모들과 상하 구분 없이 원탁 테이블에 앉아 회의를 하거나, 남들과 똑같이 줄 서서 식판에 직접 음식을 담아 먹는 모습에 국민들이 열광했던 것처럼, 스스로 내려오는 방식을 택해야 ‘소탈’ ‘겸손’한 이미지를 통해 오히려 더 장기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의전은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자리’에 대해 주는 예우인데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해 공적인 자리에 대한 예우를 사적으로 쓰려 하니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서 “의전을 하지 않으면 본인들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자기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 정유진·홍재원·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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