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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호텔방에 러닝머신 설치해 봤나요? 아스팔트에 구두약 칠해 봤나요? (2017.6.2)

사회

by 정소군 2022. 3. 1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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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런 의전까지 해봤다” 독자들의 ‘웃픈’ 사연들

경향신문 토요판팀은 지난달 22일부터 31일까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름하여 ‘의전왕’ 선발 공고를 냈다. ‘나는 이런 의전까지 해봤다’ ‘진상 상사의 의전 중독’ 등등 페이스북과 e메일을 통해 독자들이 보내온 사연들을 소개한다. 간부의 시찰을 앞두고 아스팔트에 구두약을 칠해봤다는 군대 시절의 이야기부터, 사장단은 물론 팀장급까지 의전을 제공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이야기. 우리 사회의 ‘웃픈’ 자화상이다.

 

 

▶에펠탑 보며 조깅하고 싶은 부사장의 로망을 위해 -독자 김모씨

프랑스 거주자입니다. 한국 대기업의 파리법인에서 일할 때였어요. 원래 한국 대기업의 의전은 무시무시하기로 유명하죠. 한국 본사에서 회장이나 부사장의 프랑스 방문이 결정되면 온 회사가 야단법석이 납니다.

어느 겨울날, 부사장 비서에게서 e메일이 왔어요. 부사장이 2박3일 동안 파리에 머물 예정이니 호텔을 예약해 놓으란 거였죠. 그런데 조건이 따라붙었습니다. 부사장이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면 반드시 에펠탑이 창밖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한다네요. 며칠 동안 호텔 헌팅을 다니다가 겨우 힐튼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죠. 그런데 며칠 후 다시 부사장 비서로부터 e메일이 왔습니다. “부사장님께서 아침에 센강변을 따라 조깅하시려고 했는데, 겨울이라 날씨가 춥고 습도가 높아 그냥 실내에서 운동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호텔 방 안에 트레드밀(러닝머신)을 설치해주세요.”

 

헉! 힐튼호텔 측은 “한국에서 대통령이라도 오시는 거냐”며 어리둥절. 자기들은 트레드밀 설치해줄 수 없다며 딱 잘라 거부했죠. 우리가 다 책임지고 싣고 와서 운반해 방 안에서 조립까지 하겠다고 사정사정한 끝에 겨우 승낙을 얻어냈습니다. 파리 북부에 있는 회사 피트니스 센터의 천근만근 트레드밀을 분해해서 도심 호텔까지 싣고 날라 방안에서 다시 조립하는 등 ‘난리부르스’를 떨었죠. 프랑스 직원들은 그런 우리를 보면서 “너희 지금 뭐하냐”며 아리송해하고. 그들의 마인드로는 도무지 한국 사람이 이해가 안 갔겠죠.

이 모든 것이 에펠탑을 바라보며 아침 1시간 동안 러닝머신 위를 달려보고 싶다는 부사장의 개인적인 염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한국 직원 10명이 달라붙어 돈과 힘을 쏟아낸 결과입니다.

 

 

▶팀장님 대신 ‘알뜰’ 쇼핑해드리기 -독자 안모씨

 

21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무님은 고3 수험생의 아버지였어요. 어느날 저에게 “○○야, 할 거 없지? 바람 좀 쐬고 올래?”라고 말하더군요. 또 무슨 심부름을 시키려나 했더니 딸을 위해 대학별로 돌면서 팸플릿을 받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거니 하고 두어 군데의 대학을 돌고 사무실로 돌아오다 왠지 모를 박탈감에 엄마에게 전화해 “회사 못 다니겠다”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 다른 기업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팀장이 등산에 취미가 생겼나봅니다. 등산복과 등산화를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럼 대리는 뭘 해야 할까요? 바로 상품 조사에 들어갑니다. 열심히 서핑한 끝에 최상의 것을 찾아내 팀장에게 보고합니다. 팀장이 그 상품에 흡족해하면 말단 직원 중 한 명은 사러 갑니다.

 

이때 사은품이건 뭐건 간에 팀장 기분 좋게 해드릴 ‘덤’을 챙겨가는 것은 의무죠. 가게 주인에게 양말이나 두건을 사은품으로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것은 기본이고, 실패하면 팀 경비로라도 구매해 풀세팅해서 건네드립니다.

 

정말 우리나라 직장인들 고생 많습니다. 다들 파이팅입니다!

 

 

▶‘의전’ 하면 군대죠 -독자 권모·김모·이모씨

 

군대에서 아스팔트에 구두약 칠해봤네요. ‘그분’이 오시는데 도로가 노후돼서 안 이뻐 보인다고. 결국 ‘그분’은 헬기 타고 오셨지만.

 

호국훈련하는데 연대장 온다고 언덕에 애들을 하트 모양으로 세워놨던 ‘또라이’ 보병대대장이 생각납니다. 어휴….

 

의전 하면 군대죠. 신임 여단장의 부대 순시를 앞두고 산사면을 깎아서 여단장이 좋아한다는 사루비아를 부대 이름 모양으로 심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순시 나온 여단장이 “상공에서 보면 부대 이름 다 보이고, 적이 알 거 아니야? 치워버려!”라고 한마디하자 바로 원상복구.

 

 

▶로열패밀리가 뜨면 웬 떡이냐 싶지만… -독자 윤모씨

 

모 기업 회장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가족 동반으로 일본 도쿄에 자주 오세요. 로열패밀리가 뜰 때마다 도쿄 지점장은 공항 의전에 호텔, 식당 예약까지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충거리는 식당 예약입니다. 의전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회장님이 고르실 수 있도록 미리 점심이나 저녁 먹을 식당을 서너개씩 예약해 놓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유명한 식당들은 예약하고 펑크를 내면 다음엔 예약을 받지 않는 곳들이 많아요. 그래서 보통 A, B, C 3곳 정도 복수로 예약해 놓고 오후쯤 회장이 A식당에 가겠다고 하면, 직원들에게 법인카드를 쥐여줍니다. B, C 식당에 가서 대신 자리 채우고 밥 먹으라고. 직원들 입장에선 고급 식당에서 저녁을 즐길 수 있으니 웬 떡이냐 싶기도 하지만…. 이젠 사라져야 할 의전이겠죠?

 

 

▶편식하는 팀장님 비위 맞추기 -독자 정모씨

 

의전요? 사소한 것까지 떠올려보자면 끝도 없죠. 팀장급이 이동할 일이 있을 때 미리 차 빼서 대기시켜놓는 건 너무 흔한 얘긴가요? 아, 아마 다른 기업도 그럴 것 같은데, 팀장이 외출했다 돌아올 때쯤이면 미리 마중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잡아두고 기다리기도 합니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다 같이 밥을 먹을 땐 식판에 팀장 것까지 따로 담아오는 게 암묵적 룰이에요. 어느날 입사한 지 얼마 안된 막내가 모르고 팀장이 싫어하는 반찬을 퍼왔어요. 그 다음에 다른 대리가 막내를 불러서 주의를 줬다고 하더군요. 커피도 ‘달게’ 준비하라고 해서 시럽 펌프를 두번 눌러서 갖다 줬더니 “나 당뇨 걸려 죽으라는 거냐”고 핀잔을 줄 때도 있어요. 아니, 그럼 자기가 타서 먹든가요!

 

회식 때 노래방에서 분위기 띄워주는 것도 우리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팀장이 좋아하는 노래 5곡이 있는데, 일단 그것부터 순서대로 쭉 부르고 시작해야 합니다. 매번 회식 때마다요.

 

이건 다른 팀에서 들었던 얘긴데요, 그 팀은 팀장이 지각을 자주 한대요. 그런데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부하 직원들에게 자기가 출근하자마자 바로 일할 수 있도록 컴퓨터를 미리 켜두라고 지시해놓는다고 하더군요.

 

 

▶20분 의전 위해 3~4시간 서서 대기 -독자 이모씨

 

의전 도우미 업체에서 일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의전을 하나의 예우나 서비스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왕이다’라는 제왕적인 마인드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사실 의전 도우미들이 맡은 역할은 행사 전후의 도열, 인사, 안내 정도인데 그걸 모르는 갑들은 행사가 다 끝났는데도 자기들 식사 마칠 때까지 옆에서 ‘하녀’처럼 대기하면서 물 가져다주고 수발 들어주길 바라더라고요. 예쁘고 젊은 여직원들이 많다보니 때론 성적으로 대하기도 하고요.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기업이 별로 없어요.

 

특히 국내 굴지의 모 기업은 의전 도우미들 사이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를 만큼 악명이 높아요. 보통 의전은 2시간 전부터 준비를 시키는데, 사실 그것도 되게 오버거든요. 20분 의전을 위해 2시간 전부터 대기하는 거니까. 그런데 그 기업은 3~4시간 전부터 서 있으라고 해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계속 예행연습을 반복시키고요. 큰 기업일수록 그런 의전 강도가 세요. 고위 공무원들도 그들 못지않아요. 어찌나 갑질이 심한지 어떤 도우미 업체는 공무원 의전 업무는 대놓고 거부한다니까요. 하도 별거별거 다 시켜서. 우리가 보기엔 그냥 한 명의 ‘사람’일 뿐인데, 자기들끼리는 무슨 대통령이라도 오는 듯 어찌나 소모적일 정도로 FM을 따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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