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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 그리스를 가다]“민주주의 승리” 짧았던 축제… 날 밝자 불안감에 휩싸여

국제뉴스/유럽과 러시아

by 정소군 2015. 7. 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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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Oxi·반대) 쇼크’가 유럽을 강타했다. 그리스 국민들은 5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채권단이 요구한 긴축안에 압도적인 반대표를 던졌다. 예상을 뛰어넘는 강한 ‘반대’에 유럽은 충격에 휩싸였고, 세계 증시가 출렁였다. 그리스는 ‘그렉시트(유로존 탈퇴)’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며, 유럽은 통합과 분열의 갈림길에 섰다.

 

5일(현지시간) 실시된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유럽 채권단의 제안에 61.3%가 반대해, 찬성 38.7%를 크게 앞섰다. 투표율은 62.5%였다. 지난 5년간 긴축으로 연금과 임금이 크게 줄고 실업률이 치솟는 등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른데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긴축 반대를 주도해온 집권 좌파연합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들의 용감한 선택”이라며 “민주주의를 약탈당할 수 없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는 ‘반대’ 지지자들이 국기를 들고 모여들어 시리자와 치프라스를 연호했다.

 

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유럽연합(EU) 등 채권단 트로이카는 반대파가 압승하자 고심에 빠졌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6일 프랑스 파리에서 긴급 회동을 했다. 유로존은 7일 긴급 정상회의를 열고 그리스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졌던 치프라스 총리는 “48시간 안에 채권단과 긴축을 완화하는 협상을 타결짓겠다”고 말했다. 

 

‘공’을 넘겨받은 채권단 쪽에선 미묘한 변화도 감지됐다. 그렉시트를 경고했던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투표 결과에 상관 없이 유럽은 그리스 국민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채 탕감은 절대 없다던 IMF도 지난 2일 그리스의 빚을 줄여주는 게 불가피하다는 보고서를 공개한 바 있다. 그리스가 끝내 그렉시트로 갈지, 유로존에 남을지는 7일 회의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국민투표 충격으로 7일 아시아와 유럽 등 세계 증시는 하락했으며 유로화 가치도 떨어졌다. 미국 언론들은 유럽의 경기 침체가 달러화 강세로 이어지면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인상이 늦춰질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 정부도 그리스발 금융시장 불안에 대비한 비상계획을 마련중이다. 기획재정부는 이날 한국은행,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국제금융센터 등이 참여하는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오히(Oxi·반대)!” 국제 채권단의 긴축안에 대한 그리스 국민투표가 ‘반대’의 압승으로 결론 난 5일(현지시간), 아테네 도심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튿날 날이 밝자 한층 짙어진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 속에 거리에는 다시 불안감이 휩쓰는 듯했다.


신타그마 광장 덮은 인파 “오히! 치프라스!” 연호청년·서민층이 반대 몰표

5일 오후 7시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반대’는 일찌감치 ‘찬성’을 따돌리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에는 ‘반대’ 지지자들이 하나둘 그리스 국기를 들고 모이기 시작했다. 광장 여기저기에서는 북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시민들은 “오히”와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이름을 연호했다. 사람들은 북소리에 맞춰 “채권자들은 부채 계약서를 들고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합창하며 발을 굴렀다. 

5일 밤(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 국립박물관 앞 전광판에 반대가 61.1%를 기록해 찬성(38.9%)을 앞선다는 국민투표 중간개표 결과가 전해지고 있다. 최종 결과는 반대 61.3%, 찬성 38.7%로 나왔다. 아테네 | AP연합뉴스


‘반대’를 찍었다는 대학원생 만토스(31)는 “감격을 나누러 광장으로 뛰어나왔다”면서 “오늘은 그리스 민주주의가 승리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나는 그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고 싶다”고 말했다. 시네온 카네오플로스(18)는 “대자본이 소유한 민영 언론사들이 긴축안에 찬성하라고 선동했으나 국민들은 속지 않았다”며 “시리자 정부는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의견을 물은 민주적인 정부”라고 말했다.

이번 투표 결과는 서민층과 청년들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표 전날까지도 여론조사는 찬반 박빙을 예상케 했다. 그러나 긴축으로 인한 실업과 경제난에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청년층과 저소득층이 반대에 몰표를 던졌다. 아테네에서 만난 시민들 중 긴축에 찬성한다던 이들은 대부분 교수와 전직 은행원, 연구원 등 전문직 중산층과 노년층이었다. 반면에 대학생 등 청년들은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우리는 실업자와 워킹푸어 신세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메가TV 등 현지 언론들 분석에 따르면, 소득 상위층은 절반 이상이 긴축안에 찬성표를 던진 반면, 저소득층일수록 반대가 컸다. 아테네 도심에선 찬성 응답률이 높았으나 외곽과 지방으로 갈수록 반대가 압도적이었다.

1940년 10월28일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이 침공해왔을 당시 그리스는 굴복하는 대신 ‘오히’를 선언했고, 이탈리아군을 막아냈다. 그리스는 그 후로 10월28일을 ‘오히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시리자 정부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반대 캠페인에 나서 역사적인 승리의 경험을 되새기려 애썼으며 결국 제2의 오히 선언을 통해 채권단과의 정면대결을 택한 셈이 됐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할 듯하다. 6일 날이 밝자 축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현금지급기 앞에는 다시 사람들이 길게 늘어섰고 은행들 앞에는 연금을 받으러 온 노인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택시기사 포스타스(48)는 “정부의 협상에 힘이 실릴 것으로 기대한다”면서도 “축제처럼 즐길 기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누가 승리하든 돈이 없는 사람들은 택시를 타지 못할 것이고, 내게는 달라질 게 없다”고 했다.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노인들·관광업계 ‘시름’

관광업계는 더 큰 타격을 걱정하고 있다. 빅토리아역 부근에서 가족들과 호텔을 운영하는 테오도로스(33)는 “정부가 불안정해지고 유로화가 더 빠져나갈 것이다. 자본통제가 더 오래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모두 긴축안에 찬성했다. 그는 “50~60% 정도 관광객들의 예약이 취소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요르고스(85)는 연금을 찾기 위해 현금지급기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그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을 들고 투표 이후를 전망한 기사들을 주의깊게 살폈다. 월 1000유로의 연금으로 실업자인 아들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살아간다. 그는 “유럽이 지원을 끊으면 돈이 씨가 마를 것이라니 걱정스럽다”고 했다. 옆에 있던 한 할머니는 “하루 50유로씩 연금을 찾아 연명하고 있다. 노후를 생각해 젊은 시절 아끼며 살았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며 눈물을 터뜨렸다.

역시 신타그마 광장 현금지급기 앞에 줄을 서 있던 이마누엘 그락치아(51)는 “임차료와 병원 치료비도 내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대로는 답이 없으니 그렉시트를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은 자신들이 받아갈 돈만 챙길 것이고 우리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몹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리스는 더욱더 가혹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지난달 28일 유럽중앙은행(ECB)이 긴급 유동성 지원 한도를 동결한 후 돈줄이 말라 당장 경제가 올스톱될 처지다. 정부는 하루 개인 예금인출 한도를 60유로로 정했으나 은행들은 이마저 줄여 50유로씩만 내주고 있다. BBC방송은 도이체방크 전문가의 말을 인용, 예금인출 한도가 20유로로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투표 후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시간과의 싸움”에 직면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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