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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 그리스를 가다]헐렁해진 바지허리춤… 그들은 ‘오히’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국제뉴스/유럽과 러시아

by 정소군 2015. 7. 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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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년의 그리스 남성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다소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아테네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행인이었다. 그가 갑자기 걸음 속도를 늦추더니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그는 빠른 동작으로 쓰레기통 안을 뒤졌다. 누군가 먹다버린 햄버거 포장지를 들어 올렸다. 그는 자신을 지켜본 사람이 없는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재빨리 거리의 행렬 속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스며들었다.


지난 5년간의 긴축 탓에 가파르게 상승한 그리스의 실업률과 빈곤율 통계를 이미 외신을 통해 수없이 접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테네에 도착한 첫날인 지난 1일 그 남성의 모습을 목격하고 나서야 직접 눈으로 봐야만 실감할 수 있는 숫자의 잔혹함을 깨닫게 됐다. 그는 분명 구걸에 익숙한 노숙인이나 부랑인이 아니었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는 평범한 이웃 시민이었다. 긴축이 드리운 빈곤의 그림자는 이처럼 그리스 전역을 파도처럼 뒤덮고 있었다.

기업 소유 민영방송사들 “오히 승리 땐 위기 닥쳐” 자본가 입장 편파보도만

아테네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낯선 외국 기자에게 자신이 겪는 긴축의 고통을 호소했다. 긴축으로 소비가 위축되면서 평생 일궈온 자그마한 사업체가 망한 뒤 4년 동안 백수 신세라는 한 남성은 기워 입은 자신의 바지를 보여줬다. 아테네 시청이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서 만난 한 실업 노숙인 여성은 최근 몇 년간 먹을 것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졌다면서 주먹 한 개가 쑥 들어갈 만큼 헐렁해진 바지 허리춤을 보여줬다.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서 인터뷰를 거절했던 한 연금 수급자 할머니는 기자를 뒤따라오더니 사람들이 많지 않은 장소에 이르자 아까는 미안했다면서 그제서야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가는 길을 잡고 물어본 아테네 시민 10명 중 8명은 긴축을 끝내기 위해 ‘오히(OXI·반대)’를 찍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그 모든 풍경을 목격하고서도 개표가 시작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과연 ‘오히’가 승리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의심했다. 호텔방에서 TV를 켜면 기업 자본가가 소유주인 그리스 민영방송사 앵커와 패널들은 마치 한국의 종편방송처럼 두 옥타브 높은 톤으로 ‘오히’가 승리할 경우 그리스에 전쟁 수준의 위기가 닥칠 것이라며 24시간 내내 ‘고함’을 질러댔다.

“가난한 사람은 반대하라” 국제 채권단 협상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4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 남성이 “가난한 사람은 ‘반대(OXI)’에 투표하라”는 구호가 적힌 상점 셔터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자고 있다. 아테네 | AP연합뉴스


일부 한국 언론은 이번 투표 결과를 놓고 “그리스 국민들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들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라는 단어가 주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몰라서 ‘오히’를 찍은 것이 아니다. 지난 3일 투표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열린 ‘오히’ 집회는 그리스의 잔혹한 운명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이방인인 기자조차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을 느끼게 했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에 운집한 수만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위해 ‘오히’를 찍어달라”고 호소하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를 무겁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에서 압도당할 것 같은 숙연함을 느꼈다.

집회에 참석한 29세 청년은 3년 가까이 실업자로 지내다가 지난 1월에서야 월 500유로(약 62만4000원)짜리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렉시트가 발생할 경우 힘들게 얻은 그 쥐꼬리만 한 월급의 일자리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라고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긴축 때문에 노숙인으로 전락하고, 생활고 때문에 자살한 수많은 그리스인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오히’를 찍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집회 참석한 29세 청년 “자살한 수많은 국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 오히뿐”

한국 언론들은 그리스의 비극을 악용해 ‘과잉’이라는 단어를 ‘복지’의 연상어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계 금융위기 이전까지 그리스의 국가 운영이 방만했던 것은 사실이다. 유로존에 가입한 후 골드만삭스 같은 투자은행들이 제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금리로 빌려주는 돈으로 손쉬운 행복을 맛봤을 것이다. 여기서 국제 금융기관들의 그 같은 투자행태를 우리는 ‘투기’라고 부른다.

한때 그리스에 흘러넘쳤던 돈을 손에 쥐어본 사람들은 지금 긴축으로 고통받고 있는 대다수 그리스 서민들이 아니다. 은행과 자본가, 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이었다. 서민들은 자신들이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돈 때문에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의 투표 결과를 체 게바라식 이상주의에 물든 좌파들의 철없는 행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는 진정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은 모든 투자행위에는 ‘리스크’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리스크를 ‘구제금융’이란 시스템을 통해 그리스의 공공부채로 모두 떠넘겼던 세력들이 ‘오히’를 선택한 그리스 국민투표를 통해, 이제부터라도 자신들이 치러야 했던 리스크 비용을 일부나마 치르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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