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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세계의 이탈을 선언하기까지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2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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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두 번째 페미니스트
ㆍ서한영교 지음
ㆍ아르테 | 312쪽 | 1만6000

남성 페미니스트가 되면서 “자신 안의 여성스러움과 게이스러움과 장애인스러움을 긍정하게 된” 서한영교씨(왼쪽)가 아내,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그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운동도 곧잘 했고, 적당히 욕을 섞어 말할 줄도 알았다. 학창 시절, 처음 브래지어를 하고 온 같은 반 여학생의 등 걸쇠를 잡아당기며 놀림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밥과 청소와 빨래도 모두 어머니가 도맡아 해주셨고, 그런 일상을 누리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개 편하게 살아왔다”.

사실 그는 예민한 문학소년이었다. 읽다가 죽어도 좋을 만큼 시가 좋았고, 장래 희망을 쓰는 칸에는 언제나 시인, 작가를 채워넣었다. 특히 김정란 시인의 <다시 시작하는 나비>라는 시집을 닳고 닳도록 읽었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같은 문장 앞에서 자신의 영혼에 어서 금이 가버리길 기도하기도 했다. 그의 내면에는 “글썽거리는 세계”에 매혹되는 시적 감수성과, 강함에 대한 선망이 내재하는 남성중심주의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 아슬아슬한 동거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19살이었던 2001년 창작과비평사 온라인 게시판에 박남철 시인의 소위 ‘욕시’가 올라왔다. 김정란 시인을 두고 “암똥개” “열린 XX와 그 적들” 등 온갖 욕설을 퍼부은 시였다. “말 비린내가 진동하는” 그 시를 읽은 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욕시’의 내막은 이러했다. 한 술자리에서 막 등단한 여성 시인이 박남철 시인으로부터 성희롱과 구타를 당했고, 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박남철 대책위’에 김정란 시인이 있었다. 한 문예지는 문제의 ‘욕시’를 버젓이 게재했다. 대다수 문인과 출판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제까지 당연하고 마땅하게 여겼던 세계가 매스껍게 느껴졌다. “그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는 대체로 불편해졌다. 어느 축구경기에서 팀을 이끌던 이가 능숙하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빨리 안 뛰어? 뭐하는 거야 새꺄!” 그는 수컷들의 살기 어린 승부욕이 불편해졌다. 속옷이 비치는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을 두고 “아예 나 먹어주세요, 광고를 하는구나”라고 지껄이는 친구의 말이 불쾌해졌다. 그는 점점 “음담패설이 주요 대화거리가 되는 남성 무리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이 책은 시인 서한영교씨가 자신을 ‘두 번째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게 되기까지의 분투기를 담고 있다. ‘꼴페미’라는 조롱이 난무하는 시대에 페미니스트 선언은 심지어 여성에게도, 하물며 남성에게는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속했던 익숙한 세계로부터의 경멸 어린 시선을 견뎌내는 동시에, 가까워지고 싶은 낯선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자각해야 하는 일이다. “남성-인간으로서 남성-질서 속에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자신의 무의식”을 경계하기 위해, 거의 매 순간 긴장 속에서 지내야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그는 기꺼이 그 길을 택했다. 페미니즘에 눈을 뜬 한 문학지망생은 이후 녹내장 말기로 눈이 멀어가는 애인의 곁에 머무르기로 하고, 100일 동안 아기를 품에서 키우며 돌봄을 도맡는 ‘남성 아내’로 진화해갔다.

그가 페미니스트로 몸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미세한 언어들을 점검한 것이다. 욕하는 습관을 버리고, 여성들에게 ‘꽃’과 관련된 비유를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들이 자라는 집’이라는 뜻의 자궁은 ‘세포가 자라는 집’이라는 의미의 ‘포궁’으로,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로, 산모수첩이 아니라 ‘아기수첩’으로 단어들을 바꿔 나갔다. 물론 영 어색했다. 그래서 50번씩 반복해서 연습했다. “내 언어의 세계는 내 세계의 경계를 의미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기존에 습관적으로 써오던 언어의 용법을 바꾸면 언어의 경계가 달라지고, 자기 세계의 경계도 달라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쉽지 않았던 페미니스트 선언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별을 가르는 언어들부터 바꿔

시각장애인인 아내의 출산 후

직장보다 육아를 선택

실험과 모험은 그를 흔들지만

강함보다 약함을 선택함으로써

여성과 장애인의 곁에 선

두 번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출산이 다가오자 그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100일 동안 아내는 수유와 산후조리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그 밖의 모든 일은 자신이 맡기로. 아이를 기다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앞치마에 ‘서로(아이의 이름) 아빠’라는 글자를 새겼다. 회사에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하니, “기다려 줄 수 없는 거 알죠?”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는 ‘이해한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오래된 오해는 아닐까. 오해를 오래 해서 이해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육아휴직을 하겠다는 ‘무책임한 아빠’와 어머니를 겪겠다는 ‘페미니스트 아빠’ 사이의 간극은 거대했다. 다른 남성 가장들은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서 벗어난 그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그에게 어떤 잡지사의 에디터는 “애도 있는 사람이 무책임하게…”라는 말을 흘렸다. 한 화장품 회사의 대표는 그가 집에서 육아를 하고 있다고 하자 “내 동생도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10년차 연극배우인데 그런 무능력한 놈이 결혼을 한 후 집에서 애만 키우고 있어 정말 걱정”이라고 들으란 듯이 말했다.

산부인과 병원 게시판에 붙어 있는 ‘아가를 기다리는 아빠들의 편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단어는 돈이다.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사줄게” “돈 많이 벌어서 내년에 이사 가자”. 그런 아빠들이 보기에 그는 무책임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책임(responsibility)을 영어로 하면 respond(응답)+ability(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게 보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책임이다. 그 책임을 우리 부부는 ‘집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눈다.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명령하는 책임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응답 능력으로서의 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진정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것일까?”

여러 가지 실험과 모험을 겪어 나가면서도 여전히 저자는 흔들린다. 대학 시절부터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그를 두고 몇몇 선배들은 “무슨 남자 새끼가? 고추 부끄럽게시리!”라고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는 아직도 부모성을 같이 쓰는 서한영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비아냥거리는 질문이 두려워 주변을 살피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기에 “애가 말을 하기 시작했어. 진짜 예뻐. 인간이 말을 이렇게 배우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신나게 설명했다가 “뭐야, 너도 맘충이냐? 애 엄마들처럼 브런치라도 먹으러 갈까?”라는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게지기도 했다. ‘맘충’이라는 말이 이렇게 맥락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는 것에 아찔한 충격을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새뮤얼 베케트의 격언을 떠올리며,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나는 어쩌면 평생 끊임없이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한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약자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약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기득권 남성 세계에서 이탈했고 비장애인만의 울타리 밖으로 나옴으로써 ‘금남의 세계-돌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것이 바뀌고, 보이는 것이 바뀌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삶이 통째로 바뀐다.

그는 강함에 대한 선망을 버리면서 “남성적 동일성을 위해 억압했던 자신의 여성성을 찾았다”. 게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계집애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새끼손가락을 들고 커피를 마시는 자신 안의 여성성을 도려내야 했던 그는 자신 안의 수많은 타자(여성, LGBTQ, 장애인)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선언한다. “지구에 돈만 벌러 오지 않았다. 삶이 아닌 삶은 살지 않겠다. 시를 살아내겠다.”

“두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라는 심보선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시를 살아내기 위해 폭풍 앞의 첫번째 사람인 ‘여성’과 ‘LGBTQ’와 ‘장애인’의 곁에 선 두번째 사람으로 다시 탄생했다.

저자는 분홍색 티셔츠를 하나 사서 자주 입고 다닌다. 인도의 수행자들이 입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자주색 원피스도 자주 입는다. 언젠가 아이와 산책할 때 입고 나갔다가 동네 꼬마에게 “그런 건 여자애들이나 입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벗어버릴까 잠시나마 망설이기도 했던 옷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나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않고, 구체적인 진리를 일상에서 실천해 가겠다”는 각오이다. 또한 또래와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여성혐오를 학습하게 될, 자신 안의 여성성을 공격당할지도 모를 그의 아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언젠가 아이가 ‘아빠는 페미니스트야?’라고 물어보면 ‘응, 애쓰고 있어’라고 씩씩하게 답해주기 위해.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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