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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인류’, 암스트롱 혼자만은 아니었다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2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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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달로 가는 길
ㆍ마이클 콜린스 지음·조영학 옮김
ㆍ사월의책 | 616쪽 | 2만8000



아폴로 11호 ‘사령선 파일럿’ 마이클 콜린스의 탐사 생생 기록

‘비운의 우주인’에서 감동적 필치 남긴 첫 ‘우주 에세이스트’로

‘착륙 50주년’ 맞춰 국내 번역 출간…우주개발 프로젝트 재조명

 


‘첫번째 인류(First man)’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한 명에게만 주어졌다. 그 특별한 영광은 닐 암스트롱의 몫이었다. 달의 표면에 첫 발자국을 남긴 최초의 인간. 바로 그를 뒤따라 달 착륙선 계단을 내려간 버즈 올드린은 평생 ‘두번째 사람(Second man)’으로 불려야 했다. 올드린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나를 옭아맨 그 수식어 때문에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첫번째도, 두번째도 아닌, 세번째 사람이다. 한때 그를 설명하는 기사에는 ‘잊혀진 우주인’이라는 제목까지 붙었다. 암스트롱, 올드린과 함께 아폴로 11호를 탔으나 혼자만 달을 밟지 못한 ‘비운의’ 우주비행사, 마이클 콜린스. 그의 임무는 달에 내려간 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오기 위해 홀로 남아 사령선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과 우주여행의 경험을 감동적인 필치로 담아낸 최초의 ‘우주 에세이스트’가 됐다.

그가 1974년에 쓴 <달로 가는 길>(원제 Carrying the Fire)이 달 착륙 50주년을 맞아 국내에 뒤늦게 출간됐다. 이 책은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수십명의 인물들이 거쳐야 했던 험난한 훈련, 머큐리-제미니-아폴로로 이어지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 프로그램의 과정 등 1960년대 우주탐사 초창기 풍경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낸 ‘기록문학’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폴로 계획은 냉전의 산물이다. 1961년 소련이 유인우주선 발사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존 F 케네디가 “1960년대가 끝나기 전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이 벌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우주개발의 역사는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면서 한 시기를 매듭짓는다. 달에 사람을 보낸 ‘첫번째 국가’가 되는 영광을 미국에 안겨줬을 뿐 아니라, 전 인류의 쾌거가 된 세 사람은 역사에 길이 남는 ‘영웅’이 됐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나리오가 수없이 많은 변수들 속에 ‘우연처럼’ 탄생한 하나의 조합일 뿐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단 하나의 변수만으로도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물론 결말까지 바뀔 수 있었다. ‘첫번째 인류’는 암스트롱이 아닌 다른 누가 되어도 이상할 것 없었고, 아폴로 11호가 아닌 아폴로 10호나 아폴로 14호가 최초의 달 착륙 임무를 띨 수도 있었다.

올해   89 세가 된 아폴로   11 호의 승무원이었던 마이클 콜린스. 오른쪽 사진은   1969 년 7월 20 일 닐 암스트롱과 함께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버즈 올드린이 성조기 옆에서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AP·AFP 연합뉴스



콜린스의 회상에 따르면 애초에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가 달 착륙 승무원으로 뽑히게 된 것은 최고의 3인이어서가 아니었다”. NASA에 소속된 수십명의 우주비행사는 모두 똑같이 험난한 훈련 과정을 거쳤다. 그들은 달의 운석을 캐오기 위해 그랜드캐니언 현장답사까지 다니며 지질학을 공부했고, 항로 계산법을 익히기 위해 목숨 걸고 별자리를 외웠다. 별자리를 잘못 기억했다가는 자칫 대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선이 무인도나 사막에 떨어질 가능성을 대비해 정글에서 메뚜기, 딱정벌레를 잡아먹으며 생존하는 훈련까지 받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중력 상태가 인체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구역질을 하면서 40~50회씩 포물선 비행 훈련을 반복했다. 비행기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질주하면 25초 동안 무중력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데, 이들은 물을 마시고 삼키고 비우기도 하면서 그 운명의 25초 동안 가능한 모든 시험을 수행했다. 어디 그뿐인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할 때는 중력가속도가 최대 15G까지 달할 수 있는데 이들은 원심회전기, 일명 ‘통돌이’ 훈련을 받으며 그 상황에 대비했다. 훈련이 끝나면 혈관 벽이 파열한 탓에 등 전체에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

이들이 그 고된 훈련을 견딘 것은 달에 가고 싶다는 열망 하나 때문이었다. 미국이 유인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것은 아폴로 7호부터다. 당시 NASA 시스템에 따르면, 우주선 승무원은 주승무원 3명과 예비승무원 3명으로 이뤄졌다. 예비승무원은 다음 두 차례 비행을 건너뛰고 세번째 비행에서 주승무원으로 승격된다. 따라서 아폴로 11호의 주승무원은 아폴로 8호의 예비승무원으로 구성돼야 했다.

그러나 아폴로 8호의 주승무원으로 내정돼 있던 짐 맥디비트가 우주착륙선 개발 때문에 비행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의 예비승무원이었던 피트 콘래드의 일정이 꼬여버렸다. 만약 맥디비트가 아폴로 8호를 타고 날아갔다면 아폴로 11호 사령관은 예정대로 콘래드가 됐을 것이고, 그는 암스트롱 대신 외계 위성을 걷는 최초의 인류가 됐을 것이다.

콜린스가 사령선에 남는 ‘세번째 사람’이 된 것도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은 아니었다. 그는 달에서 돌아온 후 수천번이나 “당신들 셋 중에 누가 사령선에 남고 누가 달에 착륙할지 어떻게 결정했습니까”란 질문을 받았다. 비행시험이 취소되면 팀이 해체되고 재배정되는데, 그는 그 과정에서 한번도 우주비행 경험이 없는 초짜가 포함된 팀에 합류했다가 달 착륙선 파일럿에서 사령선 파일럿으로 ‘진급’해버리고 말았다. 초짜는 절대 혼자 사령선에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 순간 이후부터 나는 달 표면을 걸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콜린스는 “아폴로 11호에서 내 자리가 최고라고 주장하면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겠지만, 나는 내 위치에 지극히 만족한다”고 말한다. “이번 모험은 세 사람에 맞게 구성됐고 세번째 자리 역시 다른 둘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달 표면을 걸을 기회를 잃은 대신 오직 그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별한 순간을 경험했다. 우주 공간 속에 홀로 존재하는 ‘고독’의 순간. 2명의 동료가 달에 내려간 동안 그는 혼자 사령선에 남아 달의 궤도를 돌았다. 달의 뒷면으로 넘어간 순간에는 지구와의 무선통신까지 끊긴다. “만일 그 순간 인류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한다면 지구 위의 30억과 달 위의 둘, 그리고 이쪽에 오직 신만이 아는 한 사람을 더해야 하리라.”

그러나 “아담 이후 아무도 겪어본 적 없는” 그 고독의 순간은 사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덕분에 만들어진 순간이었고, 콜린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 과정은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됐는데, 콜린스는 우주선 안의 카메라 앞에서 그들에 대한 감사를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남은 비행에서도 잘해낼 겁니다. 이 장비들 모두가 제대로 작동하리라고 늘 믿기 때문입니다. 우주비행이 가능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눈물 덕분입니다. 우선 공장 노동자들이 기계를 하나하나 조립했습니다. 조립 후 재시험할 때까지 여러 테스트팀이 헌신을 다해 일했죠. 이번 임무는 흡사 잠수함 잠망경 같습니다. 모두들 우리 셋만을 보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수천, 수만의 인력이 땀을 흘리고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그의 말처럼 아폴로 11호의 무사 귀환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우주복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완전히 밀폐되지 않으면 우주비행사는 체액이 증발하고 피가 보글보글 끓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우주 한복판에서 우주복 지퍼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지구 귀환 시 생존 가능한 대기의 ‘재진입 통로’는 너비가 기껏 60㎞에 불과하다. 37만㎞ 거리에서 60㎞를 맞추기란 6m 거리에서 면도날을 던져 머리카락을 가르는 것과 같다. 항로를 완벽히 계산했다 하더라도 지상의 기술자 하나가 넋 놓고 있다가 지구 직경을 우주선 컴퓨터에 잘못 입력하기라도 한다면? 아폴로 우주선은 수백만개의 부속으로 이뤄졌다. 모든 장치가 99.9% 신뢰도로 작동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수천개의 결함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그 모든 ‘만약에’의 두려움을 이겨내게 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렇게 아폴로 계획의 ‘해피엔딩’을 조망하며 반추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당대의 ‘중력’에서 자유로운 후대의 사람이라는 이점 때문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아폴로 계획은 소련과의 경쟁 욕심에 눈이 먼 무모한 계획일 수도 있었고, 실제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아폴로 계획에 쓰는 엄청난 세금으로 차라리 흑인과 빈민을 도우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미국은 거대한 기술 문제를 자유자재로 다루지만 사회, 정치, 인간본성 문제라면 지극히 우려스럽기만 하다”는 언론의 비판도 잇따랐다. 콜린스는 이 책에서 당시의 그런 비판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유인우주선 프로그램이 인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지구상의 부패는 우주 프로그램에 예산을 투입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테랑 우주인 4명이 비행기 충돌로 목숨을 잃고, 아폴로 1호 발사 전 3명의 우주인은 기계 오류로 조종석 자리에 묶인 채 화재로 사망했다. “한번도 날지 않은 아폴로가 우주인을 잇따라 살해”하는 상황에서 내가 만약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이었다면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됐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50년 전 달에 처음 사람을 보낸 인류는 이제 화성개발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화성에 식민지를 만들겠다면서 향후 10년 내에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콜린스는 책의 말미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것은 지구를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내가 첫번째 행성(지구)을 정말로 이해한 것은 두번째 행성(달)을 보고 난 이후이다. 달은 너무도 상처가 많고 황량했다. 그 혹독한 지표를 떠올릴 때마다 아름다운 행성 지구와 이 지구가 제공하는 무한한 다양성을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내 마음을 우주로 보내 꼬마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지구가 어둠에 둘러싸인 채 저 무자비한 햇빛 속에서 천천히 도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세상의 정치지도자들이 20만㎞ 밖에서 이 행성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의 관점도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국경은 보이지 않고 시끄럽던 논쟁도 순식간에 잦아들 것이다. 이 작은 공은 돌고 돌면서 경계를 지우고 하나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T S 엘리엇의 시처럼, 탐험이 끝날 때면 언제나 우리가 출발했던 곳에 이르고, 처음으로 그곳이 어디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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