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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스톱은 ‘월가 점령 운동’ 새 버전 될까

국제뉴스/16장으로 본 세상

by 정소군 2022. 3. 2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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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다음 해인 2009년 ‘개인투자자들을 위한 레퀴엠(진혼곡)’이란 제목의 논문이 나왔다. 1950년까지만 해도 미국 전체 기업 주식의 90%를 보유한 것은 개인투자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비율은 2009 30% 아래로 떨어졌고, 전체 주식거래량에서 개인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보잘것없어졌다. 논문은 개인투자자들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실제 금융위기로 무너진 것은 월스트리트가 아닌 개인투자자들이었다. 월가의 ‘큰손’들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금융위기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개인투자자들이 설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2017년 갤럽조사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전에 주식을 보유한 미국 가구의 비중은 62%였지만, 금융위기 후에는 54%로 줄어들었다.

게임스톱 주가 그래프. 연합뉴스


■개미들의 부활… 게임스톱 대첩을 펼치다

하지만 아직 개미들을 위한 레퀴엠을 연주하기엔 조금 이른 듯하다. 최근 몇년 사이 흥미로운 흐름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금융의 민주화’를 표방하고 나선 로빈후드 같은 온라인 주식 거래 플랫폼들의 등장이다.

로빈후드는 수수료와 최소 잔액 기준을 ‘0원’으로 낮추고, 1주 미만 거래도 가능하게 했다. 덕분에 적은 돈으로 주식거래를 하고자 하는 젊은층이 모여들었다. 로빈후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뒤늦게 수수료를 무료로 낮춘 또 다른 온라인 주식거래 플랫폼인 TD아메리트레이드는 지난해 1분기에만 608000여명의 신규 고객을 기록했다.

돈과 정보로 성패가 갈리는 주식시장에서 개미들은 월가에 비하면 철저히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무기는 있었으니, 바로 ‘집단지성’이다. 개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서 활발히 정보를 주고받으며 자신들만의 투자 전략을 세웠다. 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게임스톱 대첩’은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게임스톱에 투자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전략 같아 보였다. 코로나19로 외출이 어려워지면서 비디오 게임 시장에 청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영진이 합류하면서 온라인 게임업체로의 변신을 선언한 게임스톱 주가도 덩달아 올랐다. 개미들은 ‘레딧’에서 서로에게 게임스톱 주식을 추천해주곤 했다.

하지만 공매도 투자로 유명한 헤지펀드 시트론리서치와 멜빈캐피털 등이 게임스톱을 공매도하겠다고 공개 선언하면서 이번 사태가 시작됐다. 공매도는 특정 종목의 주가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 해당 주식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식을 빌려 매도 주문을 내는 투자 전략이다. 향후 주가가 내려가면 막대한 차익을 챙길 수 있다. 시트론리서치는 게임스톱의 기업가치를 분석한 결과 미래성이 없다면서 주가 하락에 베팅했다. 시트론리서치의 공동 창업자인 앤드류 레프트는 “지금 게임스톱 주식을 사는 사람은 포커게임을 할 줄 모르는 멍청이”라는 발언까지 내뱉었다.

이에 분노한 개미들이 ‘레딧’의 주식 토론 게시판인 월스트리트베츠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매도 세력에 본때를 보여주자”며 앞다퉈 게임스톱 주식 구매 인증샷을 올렸다. 310만명의 미국 개미들이 뭉친 후 2주도 안 돼 게임스톱의 주가는 1000% 넘게 폭등했다. 결국 멜빈캐피털과 시트론리서치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공매도 포기를 선언했다.

꼬리가 개를 흔든 것 같은 놀라운 반전이다. 법과 제도로도 어쩌지 못해온 ‘금강불괴’ 같은 월스트리트의 금융 권력에 한낱 개미들이 달려들어 실제 상처를 입혔다. 기업의 주가를 스스로 예언하고, 돈의 힘으로 그 예언을 실현하는 월스트리트의 엘리트 금융 권력에 반기를 든 것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게임스톱 상점. 연합뉴스


■주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월스트리트 권력

이들이 단죄하고 싶어하는 헤지펀드는 2019년 기준으로 지금도 미국에서 4000여개 기관이 2조6000억달러(약 2900조원) 규모의 돈을 굴리며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랄프 코이젠 시카고대 교수 등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수익 극대화를 위해 단타로 돈을 굴리는 헤지펀드는 일반 투자자보다 주가를 움직이는 힘이 3배 이상에 달한다. 특히 헤지펀드는 최근에도 코로나19 대유행의 비극을 이용해 개인투자자들의 공분을 자아내는 공매도로 재미를 봤다. 봉쇄 조치로 경영이 어려워진 마트 등의 종목에 대거 공매도를 걸어 큰 수익을 올린 것이다.

물론 공매도에 역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매도는 기업을 감시하고 시장의 비정상적인 버블을 잡아내 더 큰 피해가 양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공매도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힌덴버그리서치가 홍콩에 상장된 중국기업 ‘중국메탈자원’의 회계 조작 의혹을 밝혀낸 것이 그 예다.

하지만 공매도 세력이 의도적으로 주가를 떨어뜨려 이익을 보려 한다고 의심하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실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그린 영화 <빅쇼트>에는 투자은행과 신용등급기관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드러나면서 CDO(부채담보부증권)의 가치가 0이 됐는데도 신용등급을 조정하지 않고 버티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들이 가진 부실채권을 시장에 다 내다 팔고 난 후 공매도 포지션을 취하기 위해 지연작전을 쓰면서 시장을 교란한 것이다.

개미들의 힘으로 월스트리트 기득권 세력에 한방 먹인 이번 사태가 많은 이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블룸버그통신 등 미국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월가 점령 운동’의 새 버전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월스트리트의 시스템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돈과 돈이 싸우는 월가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게임스톱 기업가치와 무관하게 형성된 거품이 뒤늦게 뛰어든 개인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안겨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미 게임스톱 주가는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지난 2월 2일 하루에만 60% 가까이 폭락했다.

무엇보다 99 대 1의 싸움을 외쳤던 ‘월가 점령’ 시위에 비해 이번 사태 뒤에는 싸움에 낄 자격조차 박탈당한 수많은 사람이 있다. CNBC에 따르면, 미국 증시에서 주식을 보유한 사람은 83%가 대졸자이고, 89.5%가 백인이며, 88%는 자산 상위 10% 안에 드는 사람들이다. 주식을 가진 흑인과 히스패닉은 모두 합쳐 1.4%밖에 되지 않았다. 심지어 2017년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25%는 은행 계좌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은행 계좌 유지 비용을 낼 돈이 없어 계좌를 만들지 못했다고 답했다. 주식은커녕 은행 계좌조차 갖지 못한 이들에게 이번 게임스톱 사태는 과연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20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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