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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경제위기, 문제는 유로화야!

국제뉴스/16장으로 본 세상

by 정소군 2015. 1. 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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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화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근본적 처방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유로화 탄생은 역사적 재앙(historic disaster)이 될 수 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1월 3일 보스턴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서 내린 평가다. 그는 “유럽연합(EU) 탄생은 성공적이지만 유로화는 사실상 실패작”이라고 잘라 말했다.

유로화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1월 9일 유로화는 1유로당 1.18달러 아래로 떨어져 2005년 이후 9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1999년 1월 첫 거래가인 1.1789달러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유로존 경제가 트리플딥(3중 침체)의 위기에 놓이고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CPI) 잠정치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0.2% 하락하는 등 디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들면서 유로화가 연일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유로화를 더 끌어내릴 악재들도 남아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경기부양을 위해 대규모 양적완화를 준비 중이다. 돈을 더 많이 찍어내 경기를 살릴 수만 있다면, 유로화가 좀 더 떨어지는 것쯤은 감내할 태세다. 최대 변수는 ‘그렉시트’(Greece와 Exit의 합성어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뜻함)이다. 만약 오는 1월 25일 열리는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승리해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뛰어넘는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들이 제기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유럽중앙은행(ECB)의 모습. | 위키백과



한 지붕 열아홉 가족, 예고된 위기


유로존은 유로화를 쓰고 있는 19개 국가를 말한다. 프랑스·독일·아일랜드·핀란드·네덜란드·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을 일컫는다. 유로존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로화가 ‘경제적’인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아일랜드의 주요 무역 파트너는 미국과 영국이다. 핀란드의 주요 수출입국은 러시아와 스웨덴이다. 경제적인 분석틀로는 아일랜드와 핀란드가 유로존에 가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유로화는 EU의 결속력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였다. 미 디지털 언론인 복스는 “독일과 프랑스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핀란드와 라트비아는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유로존 가입이 필요했다”면서 “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싶어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온전한 유럽으로 인정받고 싶어했던 그리스 등도 비슷한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제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유로화 시스템은 ‘바보 같은 자해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유로존 국가들은 모두 자신들의 통화정책 주권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ECB에 넘겨야 한다. 유로존 국가들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ECB가 각 국가를 대신해 통일된 금리를 결정하고 화폐 유통량을 정한다. 문제는 19개의 유로존 국가들이 모두 너무나 이질적이고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다는 데서 발생한다. 19개 나라에게 통일된 금융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이들 국가의 경제가 긴밀히 통합돼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스페인 노동자가 네덜란드로 이주해 일자리를 구하는 것부터도 불가능하다. 일단 두 나라는 언어도 통하지 않을 뿐더러 삶의 수준도 너무 다르다.

일부 전문가들은 유럽의 경제위기 때문에 유로화가 출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유로화 때문에 유럽의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지적한다. ECB로 금융통제권을 ‘아웃소싱’한 탓에 아일랜드,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이 2008년 경제위기 당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복스는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에서 서서히 회복해 지금 ‘나홀로 활황’을 구가하고 있지만, 미국보다 빨리 위기에서 탈출한 듯 보였던 유로존이 다시 트리플딥의 위기에 놓인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유로존’이라는 후광 효과를 믿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외화가 흘러넘치면서 거품경제가 시작됐다.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자 외자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자산가격은 추락하고 실업률이 올라갔다. 현재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청년 실업률은 각각 40%와 50%를 웃도는 실정이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프랑스도 20%가 넘는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ECB의 해법은 ‘긴축’이었다. ECB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일은 “무작정 경기부양에 나서기 앞서 긴축과 구조조정에 먼저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일자리를 늘리려면 긴축보다 오히려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맞섰다. 유로존 국가들은 해마다 다음해 예산안을 EU에 제출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긴축을 우선해야 한다는 ECB는 각 유로존 국가들에게 재정적자 감축 계획에 따른 예산안을 제출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재정지출을 통해 인프라 투자를 확대, 일자리를 늘리고 싶은 프랑스와 스페인 등은 당연히 반발했다. 이는 청년 실업률이 10%를 훨씬 밑도는 독일과 실업률이 심각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처한 상황이 크게 다름에도 똑같은 금융정책 방향을 적용해야 하는 ECB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렉시트 핵폭탄, 유로존은 무사할까


최근 유로존의 위기론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그렉시트 논란이다. 총선을 앞둔 그리스에서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시리자는 구제금융에 따른 긴축을 반대하고 채권단에 채무 탕감을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리자가 집권하면 결국 ECB와 그리스가 맺은 기존 협상이 파기되면서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할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슈피겔이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그리스의 최대 채권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가 탈퇴해도 유로존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 시장의 공포를 부채질했다. 시리자는 “우리의 당선을 반대하는 쪽에서 시리자의 승리를 그렉시트라는 ‘테러리스트 시나리오’와 연결시키고 있다”면서 “그렉시트는 시리자의 선택지에 없다”고 밝혔다.

 


실제 시리자가 집권하더라도 그리스가 즉각 유로존에서 탈퇴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슈피겔의 보도는 긴축에 반대하는 시리자를 겨냥한 압박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렉시트 우려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시리자가 집권한 후 구제금융 재협상이 난항에 빠질 경우 얼마든지 그렉시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사상 첫 유로존 탈퇴라는 선례로 이어져, 이탈리아와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서도 유로존 반대 정당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도미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베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는 그렉시트가 발생할 경우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 등이 나타날 것이며 “단기적으로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능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유럽의 정치인들은 그리스의 탈퇴를 막기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강구할 것”이라면서 “유로존 유지는 고통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유로존 와해는 더 많은 비용과 어려움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유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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