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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로레알 상속녀’ 베탕쿠르의 비극 (2015.3.9)

국제뉴스/16장으로 본 세상

by 정소군 2022. 5. 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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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는 1900년대 초 요크셔 지역의 한 귀족가문 후계자들이 타이태닉호 침몰로 모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거대한 재산상속을 둘러싼 갈등과 암투, 원하지 않는 결혼 등의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성채와도 같은 아름다운 저택, 가문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일해 온 충성스런 하인 등 화려한 귀족들의 일상을 담은 볼거리로 높은 인기를 끌었다.

릴리안 베탕쿠르의 저택


그런데 프랑스가 요즘 ‘다운튼 애비’의 실사판으로 불릴 만한 사건 때문에 연일 시끄럽다. 이 실사판에도 화려한 대저택과 함께 고용주를 위해 한평생 헌신적으로 일해 온 집사와 요리사, 가사도우미가 등장한다. 그들이 “마담”이라 부르는 고용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자인 여성, 릴리안 베탕쿠르(92)다. 그녀가 바로 일명 ‘베탕쿠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실사판 드라마의 비극적인 여주인공이다.

프랑스의 유명 화장품 회사 로레알의 창업주인 외젠 슈엘러의 외동딸인 베탕쿠르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불쌍하고 작은 부자 소녀”로 불리며 유명했다. 그녀는 겨우 5살 때 엄마를 잃고, 한창 뛰어놀 15살 때부터 로레알의 화학연구실에서 일을 해야 했다. 1957년, 아버지도 사망하면서 그녀는 로레알의 유일한 상속녀가 됐다. 그녀의 재산은 오늘날 400억 달러(약 44조원)에 달한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녀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자이고, 전 세계로 따져도 재산순위 10위 안에 꼽힌다. 그러나 그녀는 주로 파리 교외 도시 뇌이쉬르센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 안에 은둔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왔다고 미국 피플지는 전했다.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복사판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21세기 현대판 귀족’인 그녀의 삶이 대중 앞에 낱낱이 까발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그녀의 딸 베탕쿠르-메이어가 사진작가인 프랑수아-마리 베니에르(67)를 고소하면서부터였다. 딸은 “베니에르는 나이가 많아 심신미약 상태인 엄마를 감언이설로 꼬드겨 125000만 달러(약 1조3700억원)의 재산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베니에르는 평생 외롭게 살아온 베탕쿠르가 늘그막에 가장 믿고 의지하던 친구였다.

그는 재능이 넘치는 사진작가였다. 지금도 세계 주요 미술관 등에는 그가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그는 1987년 프랑스 잡지 ‘에고이스트’에 실릴 베탕쿠르의 사진을 찍으면서 그녀와 첫 인연을 맺었다. 둘의 친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어쩌면 ‘불쌍하고 작은 부자 소녀’는 베니에르의 자유분방함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베니에르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철들지 않은 개구쟁이”라면서 “멈추는 방법을 모르고 달리는 미친 강아지 같은 성격”이라고 표현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베탕쿠르는 베니에르에게 금과 돈과 값비싼 예술품을 마구 선물로 안겼다.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그녀는 베니에르를 자신의 상속자로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딸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법원에 노령으로 심신이 미약한 어머니에 대한 관찰보호를 정식 요청했다. 실제 검찰이 조사한 결과, 베탕쿠르는 치매와 다소 중증의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15명의 의사로부터 제각각 처방받아 매일 수십 알의 약을 먹는 약물중독 상태였다. 베탕쿠르의 외손자인 장 빅토르 메이어는 법정에서 “2008년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그녀는 ‘베니에르에게 100만 달러를 줬다고 네 엄마가 나를 공격하는구나’라고 하소연을 했다”면서 “내가 100만 달러가 아니라 10억 달러를 주셨다고 설명하자 그녀는 ‘내가 정말 그랬다고?’라고 반문했다”고 증언했다.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한 장면


법정에는 수십 년 동안 베탕쿠르를 위해 일해온 가사도우미, 집사, 간호사, 요리사들이 줄줄이 증인으로 등장했다. 가사도우미인 도미니크 가스파르는 “베니에르는 (판단력이 흐려진 베탕쿠르를 대신해) 립스틱부터 입는 옷까지 일일이 다 정해줬고, 심지어 그녀의 일정 하나하나까지 감시했다”면서 “베니에르가 자신을 양자로 삼아 재산을 상속해 달라고 종용하는 대화를 욕실 밖에서 몰래 들은 적도 있다”고 폭로했다. 베탕쿠르의 저택에서 18년 동안 일해왔던 그녀는 베니에르를 조심하라고 자신의 고용주에게 직언을 했지만, 곧 해고됐다.

베탕쿠르의 집사는 자신이 몰래 녹음한 대화 내용을 증거로 제출했다. 언론에 폭로된 녹음 테이프 속에는 베니에르는 물론 자산관리자, 변호사 등 베탕쿠르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럿 등장한다. 그들은 세금을 어떻게 탈루할 수 있는지, 스위스 비밀계좌와 시실리 섬의 조세회피처로 어떻게 돈을 빼돌릴 것인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특히 2007년 대선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후보 진영의 측근이었던 에릭 워스 전 노동부 장관에게 정치자금을 건네줘야 한다는 대화 내용까지 폭로돼 ‘베탕쿠르 사건’은 프랑스 정계까지 뒤흔드는 대형 사건으로 비화됐다.


재산 44조원 가진 ‘21세기 현대판 귀족’
재판은 지난 1월부터 다시 재개됐다. 베탕쿠르의 재산을 노린 혐의로 법정에 올라선 사람은 모두 10명으로 늘어났다. 지난 2월, 검찰은 워스 전 장관을 비롯한 5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포기했다. 그러나 베니에르에게는 재산 몰수는 물론 425000달러의 벌금과 3년형을 구형했다. 베니에르와 짜고 베탕쿠르의 재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그의 동성 연인에게도 비슷한 구형이 내려졌다.

베니에르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릴리안은 나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했다”면서 “나는 집 같은 건 필요없다고 했는데도 그녀가 꼭 받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변호인도 “평생을 로레알의 상속녀로서만 살아왔던 베탕쿠르는 한 번도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면서 “그런 그녀가 (쓸쓸하고 무료했던) 그녀의 삶을 휘저어 놓은 자유분방한 사람에게 깊이 매료됐던 것”이라고 항변했다.

재판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 이기든지 간에 이 법정 싸움은 베탕쿠르에게 슬픈 결말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주변인들이 알고 보니 자신의 돈만 노린 하이에나였거나, 혹은 자신의 유일한 딸이 돈 때문에 어머니와 친구들을 갈라놓으려 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90세가 넘은 베탕쿠르는 지금 몸이 쇠약해 말도 듣지 못하고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로레알의 상속녀였지만, 너무 많은 돈을 가진 탓에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그녀를 세상은 마지막까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베탕쿠르 사건’은 단지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부유층 가문들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라고 평했다.

<경향신문 국제부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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