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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사회불안 동시다발 쓰나미

국제뉴스/16장으로 본 세상

by 정소군 2014. 2. 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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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가 격랑 속에 빠져들고 있다. 방글라데시 총선은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혈사태 속에 여당의 ‘반쪽 승리’로 끝났고, 태국에서는 1월 13일 방콕 전체를 마비시킬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예고돼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부정선거 규탄과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 시위가 맞물려 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지난해 말 수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점거시위를 벌였다. 정정불안이 마치 도미노처럼 동남아 전체를 휩쓸고 있는 형국이다.

동남아의 동시다발 정정불안은 각 나라마다 조금씩 배경과 이유가 다르지만, 그 기저에는 몇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와 물가급등으로 인한 생활고가 그것이다.

방글라데시는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내’라는 숙명적인 앙숙관계로 얽힌 두 명의 여성지도자 때문에 선거 때마다 정국이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다. 셰이크 하시나 총리와 칼레다 지아 방글라데시국민당(BNP)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캄보디아 의류공장 노동자들이 3일 수도 프놈펜 외곽의 카나디아 공단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며 진압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프놈펜/AP연합뉴스

하시나의 아버지인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1975년 지아의 남편인 지아우르 라만 전 대통령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암살당했다. 

하지만 라만 전 대통령 역시 또 다른 군부 쿠데타로 암살당하자 하시나와 지아는 각각 역대 대통령의 딸과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이후 둘은 1991년부터 20년 넘도록 서로 총리직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정치무대를 독식해 왔다.

문제는 둘 사이에 타협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 정권교체 시기마다 내주지 않으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사이에 유혈충돌이 빚어진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하시나 총리는 중립적인 과도정부를 구성해 달라는 지아의 요구를 묵살한 채 야권의 보이콧 속에 총선을 강행, 과반수의 선거구에서 단독 출마로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야권연합은 투표소에 불을 지르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총선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지난 두 달여 동안 150명 이상이 사망했다.

선거 때마다 정국 혼란 속으로
이런 상황은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둘러싼 ‘친(親)탁신’과 ‘반(反)탁신’이 20여년째 다투고 있는 태국도 비슷하다. 현재 태국은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 총리와 잉락의 사퇴를 주장하며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반탁신’ 세력인 수텝 트악수반 전 부총리 사이의 갈등이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는 상태다.

잉락은 정정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다음달 2일 조기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지만, 반탁신 세력인 야권은 선거 없이 각계를 대표하는 명망 있는 인사들로 과도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친탁신파의 유권자 숫자가 많아 선거를 치르면 반탁신파가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친탁신과 반탁신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과거 18번이나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는 군부가 또다시 개입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태국의 반정부 시위대가 다음달 2일로 예정된 조기총선 후보등록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23일 서로 팔짱을 낀 채 수도 방콕의 한 후보 등록소 앞을 봉쇄하고 있다. 방콕/AP연합뉴스


아시아의 최장기 집권자인 훈센 총리가 26년째 집권하고 있는 캄보디아도 부정선거 의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캄보디아는 지난해 7월 28일 실시된 총선에서 훈센 총리가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이 전체 123석 중 68석을 얻어 승리했지만, 선거인 명부 조작 등 부정선거가 자행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야권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최저임금을 현행 80달러에서 160달러로 인상해 달라는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시위가 맞물려, 지난 3일 프놈펜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5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까지 발생했다.

세계 각국의 리스크 평가로 유명한 영국 경제조사기관 ‘경제정보연구소’(EIU)는 방글라데시의 총선과 태국의 정정불안을 올해 동남아시아를 지배할 최대 이슈로 꼽으면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주변국인 인도네시아(4월)와 인도 총선(5월), 미얀마와 필리핀의 소수민족 독립투쟁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런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위기에 놓인 아시아의 민주주의’라는 사설에서 “부패한 독재 지도자들은 정부를 자신과 측근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시켰고, 이들을 민주적으로 견제할 만한 기구가 없어 선거에 대한 신뢰 자체가 상실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물가 급등에 임금은 낮아 불만 폭발
일본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은 동남아에서 벌어지는 동시다발적 시위의 이유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그 기저에는 생활고라는 공통의 이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금융위기 이후 환율 상승 등으로 물가는 급등하고 있는데, 최저임금은 너무 낮은 수준에 묶여 있어 서민들의 불만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폭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경우 최근 4년간 물가가 40% 가까이 올랐다. 생필품 물가만 따져 보면 더욱 심각하다. 방글라데시소비자연합(CAB)에 따르면, 양파 1㎏의 가격이 최근 넉 달 사이에 16%나 올랐다. 방글라데시 연구기관인 ‘정책대화센터’는 3인 가구에 필요한 한 달 기본 식재료 비용이 67달러라고 밝혔다.

결국 68달러로 오른 새 최저임금으로는 의류노동자들이 집세나 교육비는커녕 밥값조차 감당하기 벅찬 셈이다. 캄보디아에서도 지난해 10월 현재 물가상승률이 전년 대비 4.18%로 1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최저임금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정부가 구성한 노동실태조사반도 물가 등을 고려했을 때 최저임금을 현재보다 두 배 인상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지난해 말 말레이시아에서는 생필품 가격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대 1만5000여명이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독립광장을 점거하는 시위를 벌였다. 말레이시아의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11월 전년 대비 2.9%로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나라의 물가는 2015년까지 3.3% 오를 것으로 예상돼 7년 연속 가파른 물가 상승세를 기록할 전망이다.

특히 서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생필품들의 물가상승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 중이다. 지난해 10월 한 달 동안에만 설탕 가격은 14%나 치솟았고, 휘발유 가격은 11% 급등했다. 전기료를 비롯한 공공요금 역시 16.9% 올랐다.

문제는 동남아가 값싼 노동력으로 선진국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다 보니, 이들 나라에서는 최저임금 인상도 다국적 기업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의 최저임금 인상 움직임에 월마트, GAP 등 글로벌 의류기업들은 “최저임금을 올릴 경우 노동력이 더 싼 나라로 공장을 이전할 수밖에 없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양적완화 축소와 함께 동남아 화폐의 환율 가치가 하락했고, 글로벌 투자가들이 투자하기 좋은 신흥국 골라내기 작업을 하면서 투자금 이탈이 가속화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디플로맷은 “이들 국가의 시위가 단기간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의 대응능력에 따라 위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4 01/21주간경향 10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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