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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히말라야 셰르파들 ‘이유 있는’ 등반거부

국제뉴스/16장으로 본 세상

by 정소군 2014. 5. 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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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 셰르파(39)의 직업은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등정을 도와주는 ‘셰르파’이다. 셰르파는 원래 에베레스트 남쪽 기슭인 쿰부 지역에 사는 티베트족의 이름이지만, 고산족인 이들의 산악 등반 능력이 널리 알려지면서 셰르파라는 명칭 자체가 히말라야 등반 안내인을 일컫는 말이 됐다. 셰르파족으로 태어난 카지가 셰르파가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몸이 허락만 해준다면 언제까지나 계속 셰르파로 일했을 것이다. ‘히말라야 역사상 최악의 날’이라 불린 지난 4월 18일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힘든 일은 셰르파, 명예는 서구 산악인


그날 아침 일찍 그는 동료 셰르파 21명과 함께 등정로 중 가장 있기 있는 경로인 베이스캠프 바로 위쪽 ‘팝콘필드’를 오르고 있었다. 그의 ‘손님’들이 쉽게 등정할 수 있도록 빙하 곳곳에 설치된 등반용 밧줄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 해가 뜨면 눈이 녹아 위험하기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빨리 움직이려 했다. 


2개의 사다리를 걸쳐놓고 크레바스 위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던 순간, 절벽 위에서 집채만한 눈덩이가 쏟아졌다. 다리가 부러진 채 눈 속에 파묻힌 카지는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죽어가는 동료들이 고통으로 질러대는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날 사고로 16명의 셰르파가 목숨을 잃었다. 히말라야 등정이 시작된 이래 하루 동안 가장 많은 생명이 희생된 날이었다.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인 카지는 셰르파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셰르파들은 너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서구 산악인들이 베이스캠프에서 편하게 음식을 먹으며 쉬는 동안 우리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을 타야 합니다. 그들은 안전한 밤에만 이동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 위험을 무릅쓰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아침에 움직여야 해요.”


네팔의 셰르파들이 짐을 옮기고 있다. / 플리커 Denn Ukoloff



‘아웃사이드’ 편집장인 그레이슨 샤퍼는 지난 수십년간 174명의 셰르파가 산악사고로 숨졌다면서, 셰르파 전체 규모에 비춰볼 때 이는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보병 사망률의 3.5배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희박한 공기속으로>의 저자인 존 크라카우어는 뉴요커에 이렇게 썼다. “셰르파들은 산소통 하나 없이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올라간다. 산소통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뇌압 상승을 완화시켜주는) 덱사메타손 처방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다. 서구 산악인들은 자신들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험한 일은 모두 셰르파에게 미룬다. 서구 산악인들이 멘 가방 속에는 고작 물병과 사진기, 도시락이 전부다.” 


네팔 정부는 셰르파에게 20파운드(약 9㎏) 이상의 짐을 지우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셰르파들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그 두 배에 달하는 짐을 떠안기도 한다. 네팔 국립 산악가이드협회의 파상 셰르파는 “힘든 일은 우리가 다 하지만 ‘정상을 세 번, 네 번 정복했다’는 스포트라이트는 손님에게만 쏟아집니다. 그래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손님은 우리의 ‘신’이니까요”라고 말했다.


"손님은 우리의 ‘신’이니까요”


이렇게 목숨을 걸고 일한 대가로 셰르파들이 받는 돈은 한 시즌(2~3개월) 동안 3000~5000달러(311만~519만원) 정도이다. 고산지대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감자농사 정도밖에 없는 상황에서 셰르파들은 위험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해 히말라야 안내인으로 나선다. 샤퍼 편집장은 미국 공영라디오(NPR)에 “쿰부 지역에 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셰르파 가족들의 비극이 많다”면서 “40~50가구씩 모여 사는 마을에 가면 등정사고로 남편이나 아버지를 잃은 과부와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셰르파가 사고로 죽으면 보통 1만달러의 보험금이 유족에게 지급된다. 네팔의 트레킹 에이전트는 셰르파를 고용하는 산악인에게 반드시 셰르파의 생명보험을 들도록 요구하고 있다. 1만달러란 액수는 정부가 정한 보험금 최저선이다. 셰르파들은 그동안 생명보험금 최저액을 인상해 달라고 정부에 줄곧 요구해 왔지만, 히말라야 관광수익에 타격을 주게 될까 우려한 네팔 정부는 계속 미적대 왔다.


네팔 에버레스트 눈사태로 사망한 셰르파의 유족이 4월 21일 수도 카트만두의 장례식에서 오열하고 있다. 카트만두|AP연합뉴스



그러나 정부가 18일 사고로 사망한 셰르파의 유족들에게 장례 비용이나 간신히 충당할 수 있는 408달러의 위로금만 지급하면서 셰르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들은 숨진 셰르파에 대한 정부 위로금을 1041달러로 인상하고 사망 보험금 역시 2만달러로 올려주지 않으면 이번 시즌 등정을 모두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에베레스트 관광수익 중 일부를 셰르파 구호기금으로 예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셰르파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셰르파 없이 히말라야 등정이 불가능한 산악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에베레스트산의 베이스캠프에서 대기하고 있는 등정대 수십 팀은 등정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 하고 있다.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하는 전문 산악인들은 보통 여러 해 동안 수만 달러의 비용을 투자해 등정을 준비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처지다. 다급해진 정부는 구호기금 설립 등 셰르파들의 요구사항 가운데 일부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생명보험금 인상 요구에 정부서 묵살


하지만 상당수 셰르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미 짐을 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눈사태로 동생을 잃었다는 한 셰르파는 “모두 카트만두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등산로는 아직 위험하며, 빙하의 얼음덩이가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셰르파들이 숨진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 올 시즌 등반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등반계획을 취소하는 등정대도 늘어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산악인 에드 마르젝은 “내가 숨진 셰르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등정을 취소하는 것밖에 없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그 역시 이번 시즌 등정을 위해 10만 달러를 투자했다. 하지만 그는 “에베레스트산은 내년에도 있을 것이고 다음 수천년 동안에도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라면서 “하지만 셰르파들에게는 이번이 그들의 처우를 개선시킬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 “서구의 큰 여행사들은 셰르파들이 파업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면서 “우리의 탐욕과 부족한 연대의식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2014.05.06ㅣ주간경향 10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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