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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피플]갈라선 치프라스와 바루파키스, 역사는 누구 손 들어줄까

국제뉴스/유럽과 러시아

by 정소군 2015. 7. 1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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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16일(현지시간) 의회에서 연금 삭감, 부가가치세 인상 등 4개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법안들은 전체 의원 300명 가운데 228명이 찬성해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됐다. 집권 좌파연합정당 시리자 내 강경파 의원들과 야니스 바루파키스 전 재무장관이 반대표를 던지긴 했지만 통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반대’에 투표했는데 치프라스는 ‘찬성’에 사인했다”

이날 의회 앞에서는 긴축에 반대하는 그리스 시민 1만5000여명이 운집해 “우리는 배신당했다”는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시위대에 맞서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빚어진 충돌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에 참가한 실업자 아르세니오스 파파스(35)는 AFP통신에 “우리 정부는 배신자들의 정부”라면서 “우리는 국민투표에서 ‘오히(OXI·반대)’에 투표했는데, 치프라스 총리는 ‘네(NAI·찬성)’에 사인했다. 이건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왼쪽)가 파나지오티스 라파자니스 환경에너지장관과 15일 아테네의 의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테네/EPA연합뉴스


한때 가장 가까운 ‘반긴축’의 동지였던 치프라스 총리가 친유럽으로 돌아선 지금, 바루파키스 전 장관은 채권단을 향해 날선 비난을 쏟아내는 유일한 ‘반긴축’의 선봉으로 남았다. 그는 이날도 독일 유력지 ‘디차이트’ 기고문에서 “독일은 유로존을 개혁하기 위해 그리스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지난 몇년 동안 그리스의 경제난이 가중되도록 사태를 지휘해 왔다”면서 “이는 독일이 그리스의 디폴트를 유도함으로써 유로존 회원국들을 핵심 국가와 (긴축정책에 대한) 비토 세력으로 양분한 후 유로존을 구조조정하려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바루파키스 전 장관은 표결이 진행되기 직전 의회 연단에 올라 “3차 구제금융은 ‘신 베르사유 조약’과 다를 바 없다”면서 의원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가 발언하는 동안, 의석 일각에서는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란 비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바루파키스, 서민들의 대변자일까 독불장군일까

과연 바루파키스는 치프라스와 달리 끝까지 채권단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 서민들의 대변자일까. 아니면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식 행동으로 채권단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든 장본인일까. 

바루파키스(왼쪽)가 지난 6일 후임 재무장관인 유클리드 차칼로토스(오른쪽)의 등을 두드리고 있다. 아테네/AFP연합뉴스

바루파키스는 스스로를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설명한 바 있다. 1940년대 그리스 내전 당시 공산당의 편에 서서 싸운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 에섹스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호주 시드니대,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 그리스 아테네대 등의 강단에 섰다. 세계적인 석학인 갈브레이드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바루파키스를 “지구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 게임이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라고 칭하기도 했다. 

블룸버그는 바루파키스에 대해 “매우 뛰어난 경제학자”라면서도 “정치인이나 미디어와 의사소통 하는데 능숙하지 못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 바루파키스는 그리스의 구제금융 협상단을 이끌면서 많은 돌출행동으로 채권단의 불신을 초래했다. 비공개 회의 내용을 언론에 폭로하는가 하면, 유로 채권단을 ‘테러리스트’라고 거칠게 비난해 큰 반발을 샀다. 이 때문에 채권단은 “바루파키스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그를 협상단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바루파키스가 국민투표 후 재무장관 자리에서 자진 사퇴한 것도 자신이 채권단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 요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는 독일 빌트지에 “(바루파키스 같은) 그리스 정부의 게임이론가들이 자국의 미래를 두고 도박을 하고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학자로서 바루파키스가 채권단에 제시한 합의안들은 결코 비현실적이거나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채무탕감’과 같은 요구안은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국가들이 납세자의 손실로 여기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수용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긴축재정안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 이튿날인 지난 5일 아테네 도심에서 노숙자가 잠을 자고 있다. 옆에는 ‘반대’를 촉구하는 벽보들이 붙어 있다. 아테네/AP연합뉴스


그가 내세운 협상안은 ‘채무 스와프’였다. 그는 구제금융 채권을 그리스 명목성장률에 연동된 국채로 대체하고, 만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영구채권’으로 유럽중앙은행이 보유한 그리스 국채를 대체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일단 빈사상태에 빠진 그리스 경제부터 살리고 난 후에 부채를 갚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우리가 국가를 개혁할 수 있도록 재정적 여유를 좀 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숨이 막혀 개혁된 그리스가 아니라 불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국제통화기금(IMF)이 “3차 구제금융은 그리스 경제회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그리스의 채무는 지속불가능하다”면서 “30년의 상환유예기간을 줘야 한다”고 과감한 채무부담 경감을 유로존 채권단에 요구한 것과 큰 틀에서 일맥상통한다. 

또한 그는 부채상환을 위해 그리스 국유재산 일부를 민영화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난 4월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그리스 정부는 국유재산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민영화가 불가피하다”면서도 “다만 민영화가 정부 세수 증대에 직접적으로 연동이 될 수 있도록 정부가 일정부분 지분을 가진 채 사기업과 파트너십으로 민영화 하는 방안을 추진하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제안들은 자유경제연구소인 영국의 애덤스미스 연구소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애덤스미스 연구소는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에게 “바루파키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오토바이 탄 경제학자, 서민들에게는 여전히 인기

그러나 그의 요구들은 모두 채권단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바루파키스가 협상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했지만, 내가 정치적으로 그 책임을 지겠다”면서 바루파키스를 에둘러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반긴축’을 지지하는 서민들 사이에서 바루파키스는 꽤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가 재무장관에서 물러난 날, 그리스 시민들은 하루종일 그의 사퇴 소식에 촉각을 기울였다.

지난 4월 3일 바루파키스가 당시 국제경제관계부 차관이었던 차칼로토스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가고 있다. 차칼로토스는 바루파키스가 사임하면서 재무장관이 됐다. 아테네/AP연합뉴스

그리스가 채권단이 요구한 개혁안을 마감 시한 내에 의회에서 통과시키면서 이제 공은 다시 유로 채권국들에게 넘어갔다. 독일, 스페인, 핀란드 의회 등이 3차 구제금융 협상안을 통과시키면 채권단은 다시 세부적인 구제금융 지원액수와 절차를 놓고 협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지난 13일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도출된 합의안은 매우 구체적이지 않은데다 회원국들 사이의 이견이 심해 순조롭게 3차 구제금융이 진행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아직도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험은 가시지 않았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렉시트를 막기 위해 가혹한 긴축안을 감내하면서까지 유로존 채권단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치프라스의 결단과 끝까지 긴축 수용을 거부하며 채권국에게 날선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바루파키스. 둘 중 누구의 판단이 그리스를 위해 더 옳은 것이었는 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이번 합의안이 무사히 집행된다면, 3차 구제금융이 종료되는 3년 후에나 대략적이나마 판가름 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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